【위대한 전승의 메아리-강철의 령장을 모시여 우리는 승리하였다】
화선강행군 5만 수천리길
지난 조국해방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추억할 때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수자가 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해방전쟁의 3년기간에 서울과 수안보를 비롯하여 격전장들을 찾아 헤쳐가신 화선강행군길-5만 수천리,
불비쏟아지는 위험천만한 최전선을 찾고찾으시여 탁월한 지략과 기묘한 전략전술, 독창적인 전법으로 조국해방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신 위대한 수령님의 거룩한 모습을 우리 어찌 세월이 흐른들 잊을수 있으랴.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생애, 혁명력사에서 3년간의 조국해방전쟁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어가신 전선길을 되새겨보는 우리의 눈앞에 조국의 최남단 광주를 찾아 야전차를 달리시던 주체39(1950)년 8월의 잊지 못할 그 나날이 어리여온다.
광주는 지도상으로 볼 때 당시 적들이 몰켜있던 대구보다도 아래에 놓여있었다.해방지역이라고는 하지만 적들의 준동이 그 어디보다 우심했던 그곳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가시리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적비행기의 폭격이 그칠새 없고 폭탄파편이 귀전을 윙윙 스치는 그 길에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는것이 너무도 안타까와 수행성원들은 그이께 더는 이런 위험한 길을 다니지 마실것을 눈물속에 거듭 말씀올리였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험하더라도 우리가 전선에 나가 지휘관들과 전투원들을 고무해주면 그만큼 전쟁승리의 날이 앞당겨지게 된다고 하시면서 승리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또 떠나자고 길을 재촉하시였다.
이렇게 험한 길을 달려 수안보에 위치한 전선사령부에 도착하시여 작전회의를 지도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 걸음으로 향하신 곳이 바로 광주였다.
광주에 도착하시여서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늘 여기에 나온것은 앞으로의 전선정황에 대처하여 서남해안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하시며 귀중한 작전적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 어느 전쟁사의 갈피에 한 나라의 수령이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최전방에까지 나간적 있었던가.
우리 수령님께서 헤쳐가신 그 전선길들과 더불어 주체적인 군사전법들이 마련되고 조국해방전쟁의 위대한 승리가 앞당겨질수 있게 된것 아닌가.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선길에서 하신 뜻깊은 교시를 잊을수 없다.
하루빨리 제국주의침략자들을 때려부시고 세상에서 제일 강대한 나라를 일떠세울 억척의 의지를 피력하시며 그래서 자신께서는 위험한 전선길을 걷고 또 걷고있다고, 자신의 전선길은 곧 승리의 길이라고 하시던 그날의 가르치심에 우리 수령님의 천출위인상이 뜨겁게 어리여있다.
위대한 수령님께 있어서 전선길은 단순한 현지시찰이 아니였다.전승을 안아오기 위한 력사의 지름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화의 불비속을 뚫고헤치신 5만 수천리의 화선강행군길,
진정 여기에는 다 있다.
우리 인민군대가 포악한 제국주의침략자들을 타승하고 전승을 안아올수 있은 근본비결이, 과연 어떻게 되여 지난날 세계지도에서 빛을 잃었던 우리 조국이 영웅조선으로, 몇년전까지도 천대와 멸시속에 살아야만 했던 우리 인민이 영웅인민으로 그 이름을 당당히 빛내일수 있게 되였는가에 대한 긍지높은 대답이.
본사기자 백영미
조국해방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업적을 보여주는 현지지도 로정도와 사적물들
-조선혁명박물관에서-
화선강행군 5만 수천리길
지난 조국해방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추억할 때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수자가 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해방전쟁의 3년기간에 서울과 수안보를 비롯하여 격전장들을 찾아 헤쳐가신 화선강행군길-5만 수천리,
불비쏟아지는 위험천만한 최전선을 찾고찾으시여 탁월한 지략과 기묘한 전략전술, 독창적인 전법으로 조국해방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신 위대한 수령님의 거룩한 모습을 우리 어찌 세월이 흐른들 잊을수 있으랴.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생애, 혁명력사에서 3년간의 조국해방전쟁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어가신 전선길을 되새겨보는 우리의 눈앞에 조국의 최남단 광주를 찾아 야전차를 달리시던 주체39(1950)년 8월의 잊지 못할 그 나날이 어리여온다.
광주는 지도상으로 볼 때 당시 적들이 몰켜있던 대구보다도 아래에 놓여있었다.해방지역이라고는 하지만 적들의 준동이 그 어디보다 우심했던 그곳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가시리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적비행기의 폭격이 그칠새 없고 폭탄파편이 귀전을 윙윙 스치는 그 길에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는것이 너무도 안타까와 수행성원들은 그이께 더는 이런 위험한 길을 다니지 마실것을 눈물속에 거듭 말씀올리였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험하더라도 우리가 전선에 나가 지휘관들과 전투원들을 고무해주면 그만큼 전쟁승리의 날이 앞당겨지게 된다고 하시면서 승리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또 떠나자고 길을 재촉하시였다.
이렇게 험한 길을 달려 수안보에 위치한 전선사령부에 도착하시여 작전회의를 지도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 걸음으로 향하신 곳이 바로 광주였다.
광주에 도착하시여서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늘 여기에 나온것은 앞으로의 전선정황에 대처하여 서남해안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하시며 귀중한 작전적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 어느 전쟁사의 갈피에 한 나라의 수령이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최전방에까지 나간적 있었던가.
우리 수령님께서 헤쳐가신 그 전선길들과 더불어 주체적인 군사전법들이 마련되고 조국해방전쟁의 위대한 승리가 앞당겨질수 있게 된것 아닌가.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선길에서 하신 뜻깊은 교시를 잊을수 없다.
하루빨리 제국주의침략자들을 때려부시고 세상에서 제일 강대한 나라를 일떠세울 억척의 의지를 피력하시며 그래서 자신께서는 위험한 전선길을 걷고 또 걷고있다고, 자신의 전선길은 곧 승리의 길이라고 하시던 그날의 가르치심에 우리 수령님의 천출위인상이 뜨겁게 어리여있다.
위대한 수령님께 있어서 전선길은 단순한 현지시찰이 아니였다.전승을 안아오기 위한 력사의 지름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화의 불비속을 뚫고헤치신 5만 수천리의 화선강행군길,
진정 여기에는 다 있다.
우리 인민군대가 포악한 제국주의침략자들을 타승하고 전승을 안아올수 있은 근본비결이, 과연 어떻게 되여 지난날 세계지도에서 빛을 잃었던 우리 조국이 영웅조선으로, 몇년전까지도 천대와 멸시속에 살아야만 했던 우리 인민이 영웅인민으로 그 이름을 당당히 빛내일수 있게 되였는가에 대한 긍지높은 대답이.
본사기자 백영미
조국해방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업적을 보여주는 현지지도 로정도와 사적물들
-조선혁명박물관에서-
继续精准地防疫
巩固0确诊的丰硕成果
비상방역사업의 완벽성보장에 총력을
대중의 열의를 고조시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위생방역사업을 전군중적운동으로 힘있게 벌려야 하겠습니다.》
북창군에서 대중발동을 위한 조직사업을 치밀하게 짜고들면서 방역진지를 더욱 철통같이 다지는데 총력을 집중하고있다.
이곳 군에서 중시하는 문제의 하나는 방역진지를 강화하는데 자체의 인재력량을 인입하고있는것이다.
몇달전 군안의 공장, 기업소 등을 돌아보면서 비상방역사업을 료해하던 일군들은 전자업무연구소의 종업원들이 자체의 힘과 기술로 소독수생산기재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있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스스로 중요한 임무를 맡아안고 남모르게 수고를 바치고있는 연구소종업원들을 대할수록 일군들의 생각은 깊었다.아직은 싹에 불과하지만 조국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한가지라도 더 하고싶어하는 그 마음이 소중하였다.
그리하여 일군들은 그들이 소독수생산기재를 제작하기 위한 사업에서 최대의 열의를 발휘하도록 조건보장사업을 따라세웠다.실험에 필요한 원료를 보장해주는 한편 그들의 사업을 방조할수 있게 해당 부문 전문가들도 발동시켰다.
실패를 거듭하였지만 누구 하나 주저앉지 않았다.함께 방도를 모색하고 떠밀어주는 일군들의 노력이 그들을 더욱 분발하게 하였다.
결과 방역진지를 철통같이 다지는데 이바지되는 소중한 성과들이 마련되게 되였다.
이를 계기로 군에서는 일군들과 근로자들, 주민들이 비상방역사업의 주인이라는 확고한 관점을 가지고 누구나 방역진지를 튼튼히 다지는데 보탬이 되는 좋은 일을 더 많이 찾아하도록 정치사업, 해설선전사업의 도수를 더욱 높여나갔다.
하여 식료공장, 미래원을 비롯한 많은 단위의 일군들과 종업원들이 자체의 힘으로 방역물자들을 구비해놓고 비상방역사업에서 자그마한 빈틈도 나타나지 않게 하고있다.
이밖에도 군에서는 방역물자들을 종류별로 보다 면밀히 타산하여 확보하는 등 그 어떤 정황에도 주동적으로 대처할수 있게 물질기술적준비를 튼튼히 갖추기 위한 사업들을 짜고들고있다.
군에서는 대중의 열의를 부단히 고조시키면서 비상방역사업의 완벽성보장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계속 강구해나가고있다.
위생담당성원들이 책임을 다하도록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당의 예방의학적방침을 관철하는데서 기본은 위생방역사업을 강화하는것입니다.》
형제산구역체신소에서 비상방역전이 장기화되는데 맞게 모든 종업원들이 최대의 긴장성과 경각심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사업을 부단히 심화시키고있다.
통신보장초소들이 구역안의 여러 지역에 위치하고있는 조건에서 종업원들에 대한 해설선전사업에 많은 품을 넣고있다.그중의 하나가 위생담당성원들을 적극 발동하여 해설선전사업의 실효를 보다 높여나가고있는것이다.
위생담당성원들은 대중과 늘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심리를 잘 아는것만큼 단위의 실정에 맞게 계기와 장소, 인원에 구애됨이 없이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선전활동을 진행할수 있었다.
체신소에서는 위생담당성원들이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 맡은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할수 있도록 요구성을 높이는것과 함께 주에 한번씩 그들의 사업을 총화하는 체계를 세웠다.방역규정과 상식들을 환히 파악하고 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대중의 귀에 쏙쏙 들어가게 해설선전하는 묘술을 지닌 위생담당성원들을 높이 평가해주는것과 함께 편향적인 문제들을 제때에 바로잡기 위한 빈틈없는 대책을 취하였다.
이 과정에 위생담당성원들은 비상방역사업에서 자신들이 맡고있는 임무의 중요성을 깊이 명심하고 종업원들의 방역의식을 높여주기 위한 사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되였다.
위생담당성원들은 모든 종업원들을 대상으로 해설선전사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하여 그들을 부단히 각성시키고 언제 어디서나 방역규정대로 생활하는것을 의무화, 습벽화하도록 하고있다.
체신소에서는 종업원들과 손님들이 많이 드나드는 위치에 이동식음향증폭기재를 설치하고 해설선전, 위생선전을 강도높이 벌려 누구나 비상방역규정의 요구를 잘 알고 사업과 생활에 철저히 구현해나가도록 하고있다.
본사기자 김옥별
巩固0确诊的丰硕成果
비상방역사업의 완벽성보장에 총력을
대중의 열의를 고조시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위생방역사업을 전군중적운동으로 힘있게 벌려야 하겠습니다.》
북창군에서 대중발동을 위한 조직사업을 치밀하게 짜고들면서 방역진지를 더욱 철통같이 다지는데 총력을 집중하고있다.
이곳 군에서 중시하는 문제의 하나는 방역진지를 강화하는데 자체의 인재력량을 인입하고있는것이다.
몇달전 군안의 공장, 기업소 등을 돌아보면서 비상방역사업을 료해하던 일군들은 전자업무연구소의 종업원들이 자체의 힘과 기술로 소독수생산기재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있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스스로 중요한 임무를 맡아안고 남모르게 수고를 바치고있는 연구소종업원들을 대할수록 일군들의 생각은 깊었다.아직은 싹에 불과하지만 조국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한가지라도 더 하고싶어하는 그 마음이 소중하였다.
그리하여 일군들은 그들이 소독수생산기재를 제작하기 위한 사업에서 최대의 열의를 발휘하도록 조건보장사업을 따라세웠다.실험에 필요한 원료를 보장해주는 한편 그들의 사업을 방조할수 있게 해당 부문 전문가들도 발동시켰다.
실패를 거듭하였지만 누구 하나 주저앉지 않았다.함께 방도를 모색하고 떠밀어주는 일군들의 노력이 그들을 더욱 분발하게 하였다.
결과 방역진지를 철통같이 다지는데 이바지되는 소중한 성과들이 마련되게 되였다.
이를 계기로 군에서는 일군들과 근로자들, 주민들이 비상방역사업의 주인이라는 확고한 관점을 가지고 누구나 방역진지를 튼튼히 다지는데 보탬이 되는 좋은 일을 더 많이 찾아하도록 정치사업, 해설선전사업의 도수를 더욱 높여나갔다.
하여 식료공장, 미래원을 비롯한 많은 단위의 일군들과 종업원들이 자체의 힘으로 방역물자들을 구비해놓고 비상방역사업에서 자그마한 빈틈도 나타나지 않게 하고있다.
이밖에도 군에서는 방역물자들을 종류별로 보다 면밀히 타산하여 확보하는 등 그 어떤 정황에도 주동적으로 대처할수 있게 물질기술적준비를 튼튼히 갖추기 위한 사업들을 짜고들고있다.
군에서는 대중의 열의를 부단히 고조시키면서 비상방역사업의 완벽성보장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계속 강구해나가고있다.
위생담당성원들이 책임을 다하도록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당의 예방의학적방침을 관철하는데서 기본은 위생방역사업을 강화하는것입니다.》
형제산구역체신소에서 비상방역전이 장기화되는데 맞게 모든 종업원들이 최대의 긴장성과 경각심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사업을 부단히 심화시키고있다.
통신보장초소들이 구역안의 여러 지역에 위치하고있는 조건에서 종업원들에 대한 해설선전사업에 많은 품을 넣고있다.그중의 하나가 위생담당성원들을 적극 발동하여 해설선전사업의 실효를 보다 높여나가고있는것이다.
위생담당성원들은 대중과 늘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심리를 잘 아는것만큼 단위의 실정에 맞게 계기와 장소, 인원에 구애됨이 없이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선전활동을 진행할수 있었다.
체신소에서는 위생담당성원들이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 맡은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할수 있도록 요구성을 높이는것과 함께 주에 한번씩 그들의 사업을 총화하는 체계를 세웠다.방역규정과 상식들을 환히 파악하고 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대중의 귀에 쏙쏙 들어가게 해설선전하는 묘술을 지닌 위생담당성원들을 높이 평가해주는것과 함께 편향적인 문제들을 제때에 바로잡기 위한 빈틈없는 대책을 취하였다.
이 과정에 위생담당성원들은 비상방역사업에서 자신들이 맡고있는 임무의 중요성을 깊이 명심하고 종업원들의 방역의식을 높여주기 위한 사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되였다.
위생담당성원들은 모든 종업원들을 대상으로 해설선전사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하여 그들을 부단히 각성시키고 언제 어디서나 방역규정대로 생활하는것을 의무화, 습벽화하도록 하고있다.
체신소에서는 종업원들과 손님들이 많이 드나드는 위치에 이동식음향증폭기재를 설치하고 해설선전, 위생선전을 강도높이 벌려 누구나 비상방역규정의 요구를 잘 알고 사업과 생활에 철저히 구현해나가도록 하고있다.
본사기자 김옥별
당의 축산정책을 관철하는 길에 온넋을 바쳐가는 공훈사양공
세포군 귀락목장 축산제2작업반 반장 리병철동무에 대한 이야기
우리 나라에서는 한직종에서 오래동안 일하면서 공로를 세운 근로자들에게 공훈이라는 값높은 칭호를 안겨준다.
공훈용해공, 공훈기관사, 공훈광부, 공훈간호원, 공훈교원…
우리의 주인공인 세포군 귀락목장 축산제2작업반 반장 리병철동무도 축산부문에서 지난 30여년동안 성실히 일하면서 나라의 축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한것으로 하여 당 제7차대회가 열린 뜻깊은 해에 공훈사양공칭호를 수여받았다.
우리는 리병철동무의 생활을 통하여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당의 뜻을 충직하게 받드는 길에 인간의 보람찬 삶이 있다는것을 다시금 새겨안게 된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오늘 우리의 당원들과 근로자들속에는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묵묵히 자기가 맡은 초소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두다 영웅적으로 살며 투쟁할데 대한 당의 뜻을 받들고 온 나라의 일터마다 기적과 혁신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던 1980년대말, 리병철동무가 반장으로 일하던 청년작업반은 국가적인 조치에 의하여 면양작업반으로 바뀌게 되였다.
당시 리병철동무의 나이는 32살이였다.축산경험도 없는 자기가 작업반을 꽤 이끌수 있을가 하는 걱정으로 날을 보내던 그는 어느날 저녁 끝내 관리위원장을 찾아가 속마음을 터놓았다.
나무뿌리를 들추고 바위를 까내며 새땅을 찾는 일이라면 몰라도 생명체를 전문으로 다루는 일만은 도무지 감당해낼것 같지 못하다는 리병철동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관리위원장은 농장마을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어느 한 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산기슭엔 양떼가 흐르고 드넓은 전야엔 오곡이 무르익어가는 고향마을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왔다.은혜로운 해빛아래 행복한 새 생활이 펼쳐진 농장의 전경을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리병철동무에게 오랜 실농군인 관리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없던 그 세월에 이곳은 사람 못살 고장이였소.》
지금으로부터 수천만년전에 현무암질로 된 용암이 흘러나와 넓고 평탄한 덕지대로 형성된 세포등판은 평균해발고는 높지만 땅이 넓기때문에 해방전에 작은 《간도》라고 불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였다.그러나 일제가 군사기지와 군마장을 차려놓는 바람에 그들은 몰래 부대기농사를 하거나 숯구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고 그것으로 하여 세포등판은 황무지로 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옛날 지지리도 못살던 세포군의 발전에 큰 관심을 돌리시면서 세포등판에서는 축산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밝혀주시고 전쟁전에 벌써 세포군에 축산을 전문으로 하는 큰 종합농장까지 내오도록 하시였다.그러시고는 10여차에 걸쳐 기후조건과 자연지리적조건으로 보아 세포등판에서는 축산을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여러가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당의 크나큰 은덕으로 오늘 우리 농장에도 면양작업반이 생겨나게 되였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요.난 우리 마을 청년들이 지난 시기에도 그러했던것처럼 당의 뜻을 꽃피우는 길에서 언제나 앞장서길 바라오.》
청년, 그 부름을 다시금 심장깊이 새겨안느라니 리병철동무의 눈앞에는 이 땅을 지켜싸운 전화의 영웅전사들의 투쟁모습이 영화의 화면처럼 흘러갔다.1950년대의 민청원들은 조국을 지켜 청춘도 생명도 서슴없이 바쳐싸웠는데 그들이 피로써 지킨 이 땅에 땀이야 왜 바치지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저도모르게 갈마들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축산지식을 소유하기 위해 피타게 노력했다.새로 나온 도서를 얻기 위해 밤길도 주저없이 걸었고 오랜 사양공들을 찾아다니며 양사양관리에 대한 경험도 들었다.그는 자신뿐아니라 작업반원들도 하루빨리 양사양관리방법에 정통하도록 요구성을 높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리병철동무는 방금 방목지에서 돌아온 한 사양공으로부터 뜻밖에도 어미양 한마리를 잃어버렸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는 곧 전지불을 켜들고 나섰다.그의 뒤를 반원들이 따랐다.어둠속에서 덤불에 숨겨진 양을 찾는다는것은 풀밭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것만큼 어려운 일이였다.밤이 깊어 전지불마저 희미해지자 리병철동무는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자기 웃옷을 벗어 홰불을 만들었다.신고끝에 마침내 한 바위뒤에 웅크리고있는 어미양을 찾아냈을 때의 기쁨은 얼마나 컸던가.
리병철동무는 지체없이 어미양을 품에 안았다.긴장이 풀린 나머지 땅에 주저앉은 한 사양공이 이제 조금 있으면 날이 밝겠는데 좀 쉬였다가 가는것이 어떤가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게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긴 하지만 우리에겐 살붙이나 같소.자기 자식이 온밤 추위에 떨었는데 가만있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소.》
리병철동무는 늘 이렇게 사양공들이 어머니의 심정으로 양들을 관리하도록 요구했다.
일반적으로 양들은 겨울에 새끼낳이를 많이 한다.추운 겨울밤 어미양이 새끼를 낳으면 그는 자기 솜옷을 벗어 귀한 보물인양 소중히 감싸안고 자기 집의 뜨뜻한 아래목으로 향하군 했다.어미양의 젖이 모자랄 때면 집에서 사탕가루와 황경피를 넣어 만든 콩죽을 젖병에 넣어가지고 나와 새끼양을 품에 안고 먹이기도 했다.
이렇게 작업반의 양들을 돌보느라 그는 집에서 잔 날보다 양우리와 작업반실에서 밤을 새운 날이 더 많았다.그의 불같은 노력으로 작업반에는 양마리수가 나날이 늘어났다.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보람이였고 긍지였다.
그러나 생활에는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만이 있는것이 아니였다.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은 산골군인 세포땅에도 엄혹한 시련의 파도를 몰아왔다.리병철동무가 제일 가슴아팠던것은 가정살림이 어려워지는것보다 하루가 다르게 양마리수가 줄어드는것이였다.
어느해 겨울 찬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흰눈덮인 산기슭을 헤매는 사람들이 있었다.양의 먹이를 해결하기 위해 떨쳐나선 리병철동무와 작업반원들이였다.비포, 눈포, 바람포로 유명한 세포땅인지라 한줌 풀뿌리를 캐기도 힘들었다.어뜩새벽부터 날이 어둡도록 언땅을 뚜지느라 온몸이 얼어들고 손끝에서 피가 흘렀다.허기진탓에 눈판에 펄썩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리병철동무는 눈으로 주린 배를 달래며 반원들에게 위대한 장군님만 계시면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노래에도 있듯이 고난의 천리를 가면 행복의 만리가 반드시 온다고 하면서 신심을 안겨주군 하였다.
어느날 작업반원들은 리병철동무가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배려로 유럽의 어느 한 나라에 축산기술을 배우러 가게 되였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작업반장의 말대로 이제 우리가 소리치며 잘살 날이 멀지 않았다고 기뻐하는 반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리병철동무의 눈가에 뜨거운것이 고이였다.
(어버이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에 내 한생토록 보답하리라.)
이역의 하늘아래서도 리병철동무는 늘 이날의 맹세를 되새기며 직심스레 축산기술을 익혀나갔다.
그후 일터로 돌아온 리병철동무는 높은 목표를 세우고 통이 크게 일판을 벌려나갔다.양우리도 크게 짓고 양마리수도 대대적으로 늘여나가는 그의 일솜씨에 누구나 놀라움을 금치 못해했다.
새로 지을 양우리의 기초파기작업이 한창이던 어느날, 작업반에서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이 생겨났다.작업도중에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적들이 떨군 불발탄이 폭발하면서 리병철동무가 심하게 다치였던것이다.그의 온몸에 난 상처자리를 보며 작업반원들은 원쑤에 대한 치솟는 증오심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때를 추억하며 리병철동무의 안해 김진숙녀성은 이렇게 말하였다.
《병원에 후송된 남편이 의료일군들의 정성에 의하여 두번다시 생명을 되찾고 집에서 안정치료를 받을 때였습니다.한번은 자식들이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되여 사회보장을 받는것이 어떤가고 권고한적이 있었습니다.그때 남편은 숨이 붙어있는 한 당이 맡겨준 초소를 비울수 없다고 하면서 지팽이를 짚고 작업반으로 향했습니다.》
리병철동무의 집에서 작업반까지의 거리는 불과 50m밖에 되지 않는다.그러나 그때 리병철동무는 지팽이에 의지하여 그 짧은 거리를 가는데 10분나마 걸렸다고 한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힘을 낳게 하였는가.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작업반에서는 리병철동무의 발기로 당에서 보내준 우량종양과 당시 작업반에서 키우고있던 조선반가는털양을 교잡시키는데 성공하여 새끼낳이률이 높은 양들을 대대적으로 키워낸적이 있었다.고생끝에 락이라고 새 품종의 양들이 늘어나는것을 보며 작업반원들모두가 기뻐할 때 리병철동무는 그 양품종을 군의 다른 농장들에 보내줄 생각을 하고있었다.
그때 자기들의 정성이 깃든 양들을 선뜻 보내기 아쉬워하는 사양공들에게 리병철동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선길을 이어가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세포등판에 구름처럼 흘러가는 양떼를 보시며 잠시라도 기뻐하신다면 난 더 바랄게 없소.》
자나깨나 당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불타는 마음, 바로 이것이 리병철동무가 어려워도 힘겨워도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내달리게 한 힘의 원천이였다.
리병철동무는 세포등판에 양의 마리수만 늘인것이 아니라 그 땅을 대를 이어 가꾸어갈 주인공들을 키우는데도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언제인가 리병철동무는 여러명의 사양공들이 서로 사랑을 약속하고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결혼식을 미루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그들중에는 당의 뜻을 받들고 고향도 아닌 이곳으로 탄원해온 청년들도 있었다.
리병철동무는 청년들의 리상과 포부를 귀중히 여기고 자신이 그들의 부모를 대신하여 결혼상을 차려주기로 마음먹었다.그리고 자식들을 위하여 마련해놓았던 례장감도 내놓으며 결혼식준비를 위해 밤잠을 잊고 뛰여다니였다.그의 이런 뜨거운 진정에 의하여 한날한시에 3쌍의 청춘남녀가 뜻깊은 결혼상을 받아안는 경사가 귀락땅에 펼쳐지게 되였다.
그후에도 이런 일은 계속되였다.이제는 그들모두가 초급일군으로, 혁신자로 자라났다고 한다.
그 옛날 사람 못살 세포땅을 행복의 대지로 전변시킬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들과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뜻을 꽃피우기 위해 수십년세월 성실한 땀과 노력을 바쳐온 그의 공로는 한치의 땅도 적에게 내여주지 말라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을 피로써 지켜싸운 1211고지방위자들의 위훈에 못지 않다고 말할수 있다.
하기에 당에서는 리병철동무를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탄생 105돐 경축행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70돐 경축행사에 대표로 불러주고 사회주의애국공로자로 그의 삶을 값높이 내세워준것이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정영철
세포군 귀락목장 축산제2작업반 반장 리병철동무에 대한 이야기
우리 나라에서는 한직종에서 오래동안 일하면서 공로를 세운 근로자들에게 공훈이라는 값높은 칭호를 안겨준다.
공훈용해공, 공훈기관사, 공훈광부, 공훈간호원, 공훈교원…
우리의 주인공인 세포군 귀락목장 축산제2작업반 반장 리병철동무도 축산부문에서 지난 30여년동안 성실히 일하면서 나라의 축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한것으로 하여 당 제7차대회가 열린 뜻깊은 해에 공훈사양공칭호를 수여받았다.
우리는 리병철동무의 생활을 통하여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당의 뜻을 충직하게 받드는 길에 인간의 보람찬 삶이 있다는것을 다시금 새겨안게 된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오늘 우리의 당원들과 근로자들속에는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묵묵히 자기가 맡은 초소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두다 영웅적으로 살며 투쟁할데 대한 당의 뜻을 받들고 온 나라의 일터마다 기적과 혁신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던 1980년대말, 리병철동무가 반장으로 일하던 청년작업반은 국가적인 조치에 의하여 면양작업반으로 바뀌게 되였다.
당시 리병철동무의 나이는 32살이였다.축산경험도 없는 자기가 작업반을 꽤 이끌수 있을가 하는 걱정으로 날을 보내던 그는 어느날 저녁 끝내 관리위원장을 찾아가 속마음을 터놓았다.
나무뿌리를 들추고 바위를 까내며 새땅을 찾는 일이라면 몰라도 생명체를 전문으로 다루는 일만은 도무지 감당해낼것 같지 못하다는 리병철동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관리위원장은 농장마을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어느 한 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산기슭엔 양떼가 흐르고 드넓은 전야엔 오곡이 무르익어가는 고향마을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왔다.은혜로운 해빛아래 행복한 새 생활이 펼쳐진 농장의 전경을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리병철동무에게 오랜 실농군인 관리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없던 그 세월에 이곳은 사람 못살 고장이였소.》
지금으로부터 수천만년전에 현무암질로 된 용암이 흘러나와 넓고 평탄한 덕지대로 형성된 세포등판은 평균해발고는 높지만 땅이 넓기때문에 해방전에 작은 《간도》라고 불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였다.그러나 일제가 군사기지와 군마장을 차려놓는 바람에 그들은 몰래 부대기농사를 하거나 숯구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고 그것으로 하여 세포등판은 황무지로 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옛날 지지리도 못살던 세포군의 발전에 큰 관심을 돌리시면서 세포등판에서는 축산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밝혀주시고 전쟁전에 벌써 세포군에 축산을 전문으로 하는 큰 종합농장까지 내오도록 하시였다.그러시고는 10여차에 걸쳐 기후조건과 자연지리적조건으로 보아 세포등판에서는 축산을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여러가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당의 크나큰 은덕으로 오늘 우리 농장에도 면양작업반이 생겨나게 되였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요.난 우리 마을 청년들이 지난 시기에도 그러했던것처럼 당의 뜻을 꽃피우는 길에서 언제나 앞장서길 바라오.》
청년, 그 부름을 다시금 심장깊이 새겨안느라니 리병철동무의 눈앞에는 이 땅을 지켜싸운 전화의 영웅전사들의 투쟁모습이 영화의 화면처럼 흘러갔다.1950년대의 민청원들은 조국을 지켜 청춘도 생명도 서슴없이 바쳐싸웠는데 그들이 피로써 지킨 이 땅에 땀이야 왜 바치지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저도모르게 갈마들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축산지식을 소유하기 위해 피타게 노력했다.새로 나온 도서를 얻기 위해 밤길도 주저없이 걸었고 오랜 사양공들을 찾아다니며 양사양관리에 대한 경험도 들었다.그는 자신뿐아니라 작업반원들도 하루빨리 양사양관리방법에 정통하도록 요구성을 높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리병철동무는 방금 방목지에서 돌아온 한 사양공으로부터 뜻밖에도 어미양 한마리를 잃어버렸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는 곧 전지불을 켜들고 나섰다.그의 뒤를 반원들이 따랐다.어둠속에서 덤불에 숨겨진 양을 찾는다는것은 풀밭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것만큼 어려운 일이였다.밤이 깊어 전지불마저 희미해지자 리병철동무는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자기 웃옷을 벗어 홰불을 만들었다.신고끝에 마침내 한 바위뒤에 웅크리고있는 어미양을 찾아냈을 때의 기쁨은 얼마나 컸던가.
리병철동무는 지체없이 어미양을 품에 안았다.긴장이 풀린 나머지 땅에 주저앉은 한 사양공이 이제 조금 있으면 날이 밝겠는데 좀 쉬였다가 가는것이 어떤가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게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긴 하지만 우리에겐 살붙이나 같소.자기 자식이 온밤 추위에 떨었는데 가만있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소.》
리병철동무는 늘 이렇게 사양공들이 어머니의 심정으로 양들을 관리하도록 요구했다.
일반적으로 양들은 겨울에 새끼낳이를 많이 한다.추운 겨울밤 어미양이 새끼를 낳으면 그는 자기 솜옷을 벗어 귀한 보물인양 소중히 감싸안고 자기 집의 뜨뜻한 아래목으로 향하군 했다.어미양의 젖이 모자랄 때면 집에서 사탕가루와 황경피를 넣어 만든 콩죽을 젖병에 넣어가지고 나와 새끼양을 품에 안고 먹이기도 했다.
이렇게 작업반의 양들을 돌보느라 그는 집에서 잔 날보다 양우리와 작업반실에서 밤을 새운 날이 더 많았다.그의 불같은 노력으로 작업반에는 양마리수가 나날이 늘어났다.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보람이였고 긍지였다.
그러나 생활에는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만이 있는것이 아니였다.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은 산골군인 세포땅에도 엄혹한 시련의 파도를 몰아왔다.리병철동무가 제일 가슴아팠던것은 가정살림이 어려워지는것보다 하루가 다르게 양마리수가 줄어드는것이였다.
어느해 겨울 찬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흰눈덮인 산기슭을 헤매는 사람들이 있었다.양의 먹이를 해결하기 위해 떨쳐나선 리병철동무와 작업반원들이였다.비포, 눈포, 바람포로 유명한 세포땅인지라 한줌 풀뿌리를 캐기도 힘들었다.어뜩새벽부터 날이 어둡도록 언땅을 뚜지느라 온몸이 얼어들고 손끝에서 피가 흘렀다.허기진탓에 눈판에 펄썩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리병철동무는 눈으로 주린 배를 달래며 반원들에게 위대한 장군님만 계시면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노래에도 있듯이 고난의 천리를 가면 행복의 만리가 반드시 온다고 하면서 신심을 안겨주군 하였다.
어느날 작업반원들은 리병철동무가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배려로 유럽의 어느 한 나라에 축산기술을 배우러 가게 되였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작업반장의 말대로 이제 우리가 소리치며 잘살 날이 멀지 않았다고 기뻐하는 반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리병철동무의 눈가에 뜨거운것이 고이였다.
(어버이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에 내 한생토록 보답하리라.)
이역의 하늘아래서도 리병철동무는 늘 이날의 맹세를 되새기며 직심스레 축산기술을 익혀나갔다.
그후 일터로 돌아온 리병철동무는 높은 목표를 세우고 통이 크게 일판을 벌려나갔다.양우리도 크게 짓고 양마리수도 대대적으로 늘여나가는 그의 일솜씨에 누구나 놀라움을 금치 못해했다.
새로 지을 양우리의 기초파기작업이 한창이던 어느날, 작업반에서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이 생겨났다.작업도중에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적들이 떨군 불발탄이 폭발하면서 리병철동무가 심하게 다치였던것이다.그의 온몸에 난 상처자리를 보며 작업반원들은 원쑤에 대한 치솟는 증오심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때를 추억하며 리병철동무의 안해 김진숙녀성은 이렇게 말하였다.
《병원에 후송된 남편이 의료일군들의 정성에 의하여 두번다시 생명을 되찾고 집에서 안정치료를 받을 때였습니다.한번은 자식들이 아버지의 건강이 걱정되여 사회보장을 받는것이 어떤가고 권고한적이 있었습니다.그때 남편은 숨이 붙어있는 한 당이 맡겨준 초소를 비울수 없다고 하면서 지팽이를 짚고 작업반으로 향했습니다.》
리병철동무의 집에서 작업반까지의 거리는 불과 50m밖에 되지 않는다.그러나 그때 리병철동무는 지팽이에 의지하여 그 짧은 거리를 가는데 10분나마 걸렸다고 한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힘을 낳게 하였는가.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작업반에서는 리병철동무의 발기로 당에서 보내준 우량종양과 당시 작업반에서 키우고있던 조선반가는털양을 교잡시키는데 성공하여 새끼낳이률이 높은 양들을 대대적으로 키워낸적이 있었다.고생끝에 락이라고 새 품종의 양들이 늘어나는것을 보며 작업반원들모두가 기뻐할 때 리병철동무는 그 양품종을 군의 다른 농장들에 보내줄 생각을 하고있었다.
그때 자기들의 정성이 깃든 양들을 선뜻 보내기 아쉬워하는 사양공들에게 리병철동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선길을 이어가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세포등판에 구름처럼 흘러가는 양떼를 보시며 잠시라도 기뻐하신다면 난 더 바랄게 없소.》
자나깨나 당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불타는 마음, 바로 이것이 리병철동무가 어려워도 힘겨워도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내달리게 한 힘의 원천이였다.
리병철동무는 세포등판에 양의 마리수만 늘인것이 아니라 그 땅을 대를 이어 가꾸어갈 주인공들을 키우는데도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언제인가 리병철동무는 여러명의 사양공들이 서로 사랑을 약속하고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결혼식을 미루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그들중에는 당의 뜻을 받들고 고향도 아닌 이곳으로 탄원해온 청년들도 있었다.
리병철동무는 청년들의 리상과 포부를 귀중히 여기고 자신이 그들의 부모를 대신하여 결혼상을 차려주기로 마음먹었다.그리고 자식들을 위하여 마련해놓았던 례장감도 내놓으며 결혼식준비를 위해 밤잠을 잊고 뛰여다니였다.그의 이런 뜨거운 진정에 의하여 한날한시에 3쌍의 청춘남녀가 뜻깊은 결혼상을 받아안는 경사가 귀락땅에 펼쳐지게 되였다.
그후에도 이런 일은 계속되였다.이제는 그들모두가 초급일군으로, 혁신자로 자라났다고 한다.
그 옛날 사람 못살 세포땅을 행복의 대지로 전변시킬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들과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뜻을 꽃피우기 위해 수십년세월 성실한 땀과 노력을 바쳐온 그의 공로는 한치의 땅도 적에게 내여주지 말라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명령을 피로써 지켜싸운 1211고지방위자들의 위훈에 못지 않다고 말할수 있다.
하기에 당에서는 리병철동무를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탄생 105돐 경축행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70돐 경축행사에 대표로 불러주고 사회주의애국공로자로 그의 삶을 값높이 내세워준것이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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