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요부(破窯賦)
天有不測風雲
하늘에는 예측할 수 없는 바람과 구름이 있고
人有旦夕禍福
사람은 아침 저녁에 있을 화와 복을 알지 못한다.
蜈蚣百足行不及蛇
오공(지네)은 발이 많으나 달리는 것은 뱀을 따르지 못하고
家鷄翼大飛不及鳥
닭은 날개는 크나 나는 것은 새를 따르지 못한다.
馬有千里之程
말은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으나
非人不能自往
사람이 타지 않으면 스스로 가지 못하며
人有凌雲之志
사람은 비록 구름과 같은 뜻이 있다고 하여도
非運不能騰達
운이 따르지 않으면 그 뜻을 펼칠 수 없다.
文章蓋世孔子尙困於東邦
학문이 세상을 뒤 덮은 공자도 일찍이 진나라에서 곤욕을 당하였으며
武略超群太公垂釣於渭水
무략이 출중한 강태공도 위수 강가에서 낚시를 드리우며 세월을 보냈다.
盜跖年長不是善良之輩
도척은 장수하였으나 선량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顔回命短非凶惡之徒
안회는 단명하였지만 흉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堯舜至聖却生不肖之子
요순은 비록 성인이었으나 불초한 자식을 낳았으며
瞽叟頑呆反生大聖之兒
고수는 완고하고 미련하였지만 도리어 대성인을 낳았다.
張良原是布衣 蕭何稱謂縣吏
장량은 원래 한미한 선비였고 소하는 작은 현의 관리에 불과 하였다.
晏子身無五尺封爲齊國首相
안자는 오척이 안되는 단신이었으나 제나라의 수상으로 봉하여졌고
孔明居臥草廬能作蜀漢軍師
제갈공명은 초려에 은거하다 촉한의 불세출의 군사가 되었다.
韓信無縛鷄之力 封爲漢朝大將
한신은 스스로 닭 잡을 힘도 없었으나 한조의 대장군이 되었고
馮唐有安邦之志 到老半官無封
풍당은 나라를 평안하게 할 뜻이 있었으나 늙도록 미관말직도 얻지를 못하였으며
李廣有射虎之威 終身不第
이광 또한 활로 호랑이를 쏠 수 있는 위력이 있었으나 종신토록 급제를 하지 못하였다.
楚王雖雄難免烏江自刎
초왕은 비록 영웅이나 오강에서 자결함을 면치 못하였고
漢王雖弱却有河山萬里
한왕은 비록 약하였으나 산하만리의 나라를 세웠다.
滿腹經綸白髮不第 才疏學淺少年登科
경륜 가득 백발이 되도록 급제를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능 없고 학문이 깊지 못해도 소년에 등과 하는 사람도 있다.
有先富而後貧 有先貧而後富
처음에는 부유하다 나중에 가난해지는가 하면 처음에는 가난하다가도 나중에는 부하게 되기도 한다.
蛟龍未遇潛身於魚蝦之間
교룡이 때를 얻지 못하면 물고기나 새우들이 노는 물속에 몸을 잠기며
君子失時拱手於小人之下
군자도 시운을 얻지 못하면 소인의 아래에서 몸을 굽힌다.
天不得時日月無光 地不得時草木不長
하늘도 때가 되지 않으면 해와 달의 광채가 없으며 땅도 때가 되지 않으면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水不得時風浪不平 人不得時利運不通
물도 때가 되지 않으면 풍랑이 일어 잔잔할 수 없으며 사람도 때를 얻지 못하면 이로운 운이라도 뜻이 통하지 않는다.
昔時也 余在洛陽 日投僧院 夜宿寒窯
내가 어릴 적 낙양에 머무를 때 낮에는 절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밤에는 차가운 도자기 가마에서 잠을 청하였다.
布衣不能遮其體 淡粥不能充其飢
입는 옷은 몸을 다 가릴 수 없었고 멀건 죽으로는 배고픔을 면할 수가 없었다.
上人憎 下人壓 皆言余之賤也
그 때 윗사람들은 나를 미워하였고 아래 사람들 역시 나를 억누르려 하며 모두 나에 대하여 말하기를 천하다고 하였다.
余曰, 非賤也 乃時也運也命也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천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 주어진 時와 運과 命이 그러한 것뿐이다.
余及第登科官至極品 位列三公
내가 그 뒤에 과거에 등과를 하고 벼슬이 높아져 지위가 삼공의 반열에 이르니
有撻百僚之杖 有斬嗇吝之劍
만조백관을 통솔할 수 있고 생사여탈의 징벌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出則壯士 執鞭 入則佳人捧秧
밖으로 나갈 때는 채찍을 든 군사들이 호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미인이 시중을 거들며
思衣則有綾羅錦緞 思食則有山珍海味
옷 입을 생각만 하면 능라금단이 대령되고 음식 먹을 생각만 해도 산해진미를 대령하였다.
上人寵 下人擁 人皆仰慕 言余之貴也
윗사람은 나를 총애하며 신분이 낮은 이들은 나를 받들면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흠모하고 말하기를 내가 귀하다고 하였다.
余曰, 非貴也 乃時也運也命也
그 때 내가 말하기를 내가 귀한 것이 아니고 단지 나에게 주어진 時와 運과 命일 뿐이라 하였다.
蓋人生在世
대저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富貴不可捧 貧賤不可欺
부귀만을 받드는 것은 옳지 못하며 빈천함을 업신여기는 것 또한 옳지 않은 것으로
此乃天地循環 終而復始者也
이는 천지가 순환하여 마치면 다시 시작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天有不測風雲
하늘에는 예측할 수 없는 바람과 구름이 있고
人有旦夕禍福
사람은 아침 저녁에 있을 화와 복을 알지 못한다.
蜈蚣百足行不及蛇
오공(지네)은 발이 많으나 달리는 것은 뱀을 따르지 못하고
家鷄翼大飛不及鳥
닭은 날개는 크나 나는 것은 새를 따르지 못한다.
馬有千里之程
말은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으나
非人不能自往
사람이 타지 않으면 스스로 가지 못하며
人有凌雲之志
사람은 비록 구름과 같은 뜻이 있다고 하여도
非運不能騰達
운이 따르지 않으면 그 뜻을 펼칠 수 없다.
文章蓋世孔子尙困於東邦
학문이 세상을 뒤 덮은 공자도 일찍이 진나라에서 곤욕을 당하였으며
武略超群太公垂釣於渭水
무략이 출중한 강태공도 위수 강가에서 낚시를 드리우며 세월을 보냈다.
盜跖年長不是善良之輩
도척은 장수하였으나 선량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顔回命短非凶惡之徒
안회는 단명하였지만 흉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堯舜至聖却生不肖之子
요순은 비록 성인이었으나 불초한 자식을 낳았으며
瞽叟頑呆反生大聖之兒
고수는 완고하고 미련하였지만 도리어 대성인을 낳았다.
張良原是布衣 蕭何稱謂縣吏
장량은 원래 한미한 선비였고 소하는 작은 현의 관리에 불과 하였다.
晏子身無五尺封爲齊國首相
안자는 오척이 안되는 단신이었으나 제나라의 수상으로 봉하여졌고
孔明居臥草廬能作蜀漢軍師
제갈공명은 초려에 은거하다 촉한의 불세출의 군사가 되었다.
韓信無縛鷄之力 封爲漢朝大將
한신은 스스로 닭 잡을 힘도 없었으나 한조의 대장군이 되었고
馮唐有安邦之志 到老半官無封
풍당은 나라를 평안하게 할 뜻이 있었으나 늙도록 미관말직도 얻지를 못하였으며
李廣有射虎之威 終身不第
이광 또한 활로 호랑이를 쏠 수 있는 위력이 있었으나 종신토록 급제를 하지 못하였다.
楚王雖雄難免烏江自刎
초왕은 비록 영웅이나 오강에서 자결함을 면치 못하였고
漢王雖弱却有河山萬里
한왕은 비록 약하였으나 산하만리의 나라를 세웠다.
滿腹經綸白髮不第 才疏學淺少年登科
경륜 가득 백발이 되도록 급제를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능 없고 학문이 깊지 못해도 소년에 등과 하는 사람도 있다.
有先富而後貧 有先貧而後富
처음에는 부유하다 나중에 가난해지는가 하면 처음에는 가난하다가도 나중에는 부하게 되기도 한다.
蛟龍未遇潛身於魚蝦之間
교룡이 때를 얻지 못하면 물고기나 새우들이 노는 물속에 몸을 잠기며
君子失時拱手於小人之下
군자도 시운을 얻지 못하면 소인의 아래에서 몸을 굽힌다.
天不得時日月無光 地不得時草木不長
하늘도 때가 되지 않으면 해와 달의 광채가 없으며 땅도 때가 되지 않으면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水不得時風浪不平 人不得時利運不通
물도 때가 되지 않으면 풍랑이 일어 잔잔할 수 없으며 사람도 때를 얻지 못하면 이로운 운이라도 뜻이 통하지 않는다.
昔時也 余在洛陽 日投僧院 夜宿寒窯
내가 어릴 적 낙양에 머무를 때 낮에는 절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밤에는 차가운 도자기 가마에서 잠을 청하였다.
布衣不能遮其體 淡粥不能充其飢
입는 옷은 몸을 다 가릴 수 없었고 멀건 죽으로는 배고픔을 면할 수가 없었다.
上人憎 下人壓 皆言余之賤也
그 때 윗사람들은 나를 미워하였고 아래 사람들 역시 나를 억누르려 하며 모두 나에 대하여 말하기를 천하다고 하였다.
余曰, 非賤也 乃時也運也命也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천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 주어진 時와 運과 命이 그러한 것뿐이다.
余及第登科官至極品 位列三公
내가 그 뒤에 과거에 등과를 하고 벼슬이 높아져 지위가 삼공의 반열에 이르니
有撻百僚之杖 有斬嗇吝之劍
만조백관을 통솔할 수 있고 생사여탈의 징벌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出則壯士 執鞭 入則佳人捧秧
밖으로 나갈 때는 채찍을 든 군사들이 호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미인이 시중을 거들며
思衣則有綾羅錦緞 思食則有山珍海味
옷 입을 생각만 하면 능라금단이 대령되고 음식 먹을 생각만 해도 산해진미를 대령하였다.
上人寵 下人擁 人皆仰慕 言余之貴也
윗사람은 나를 총애하며 신분이 낮은 이들은 나를 받들면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흠모하고 말하기를 내가 귀하다고 하였다.
余曰, 非貴也 乃時也運也命也
그 때 내가 말하기를 내가 귀한 것이 아니고 단지 나에게 주어진 時와 運과 命일 뿐이라 하였다.
蓋人生在世
대저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富貴不可捧 貧賤不可欺
부귀만을 받드는 것은 옳지 못하며 빈천함을 업신여기는 것 또한 옳지 않은 것으로
此乃天地循環 終而復始者也
이는 천지가 순환하여 마치면 다시 시작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历史[超话]##韩国[超话]##老照片[超话]##朝鲜族[超话]#
순정효황후 윤씨 [純貞孝皇后 尹氏, 1894 ~ 1966]- The Last Empress of Joseon
Photo taken in 1909, first published between 1910-1920
대한제국의 황후이자 일제 강점기의 이왕비, 이왕대비였다.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계후(繼后)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순명효황후 민씨 純明孝皇后 閔氏 이후 두번째 황후이다.
박영효, 이재각 등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 인사인 윤택영의 딸이다.
1910년 10월 한일 합방 당시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으려고 고집하였으나, 숙부 윤덕영이 빼앗아갔다. 해방 이후에는 창덕궁과 정릉 수인재에서 거주하였다. 시호는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懿慈仁純貞孝皇后)이며, 이는 정식 시호가 아니라 해방 후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이다. 순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다. 불교 법명은 대지월(大地月)이다.
1894년 9월 19일(음력 8월 20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에 당시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 민씨가 사망하자 1907년 1월 24일에 12살의 나이로 황태자비로 책봉되었고, 이때 아버지 윤택영과 서시모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 거액의 뇌물이 오갔다는 풍설이 돌았다. 그 해 부군인 황태자 순종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그녀도 황후가 되었다.
순정효황후는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국새(國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백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제에 의해 피탈되어 멸망을 맞게 되었다.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됐으므로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렀으며 1926년 4월,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사망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昌德宮)의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2].
해방 이후에는 1947년 신적강하 조치되어 이왕대비에서 평민으로 전락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창덕궁에 남아 황실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궁궐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는 조선인민군을 당시 5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순정효황후는 두려움을 모르는 여걸(女傑)이었다.
1951년 대한민국의 전세가 급박해지자 미군에 의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궁핍한 생활을 전전하던 끝에 1953년 한국휴전협정으로 전쟁이 중단되자 바로 환궁하려 하였으나, 제1공화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순정효황후에 대한 민심을 두려워하여 환궁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정릉의 수인제(修仁齊)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1959년에는 비구니로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얻었고, 이듬해 1960년, 전(前)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吳在璟)의 노력으로 환궁에 성공하였고,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 및 의민태자 일가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며 독서와 피아노 연주로 소일하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던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냉철함으로 황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평생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 실력은 타임지를 읽어낼 정도였다고 전한다. 1966년 2월 3일, 창덕궁 석복헌(錫福軒)에서 심장마비로 73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원문
순정효황후 윤씨 [純貞孝皇后 尹氏, 1894 ~ 1966]- The Last Empress of Joseon
Photo taken in 1909, first published between 1910-1920
대한제국의 황후이자 일제 강점기의 이왕비, 이왕대비였다.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계후(繼后)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순명효황후 민씨 純明孝皇后 閔氏 이후 두번째 황후이다.
박영효, 이재각 등과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던 친일 인사인 윤택영의 딸이다.
1910년 10월 한일 합방 당시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으려고 고집하였으나, 숙부 윤덕영이 빼앗아갔다. 해방 이후에는 창덕궁과 정릉 수인재에서 거주하였다. 시호는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懿慈仁純貞孝皇后)이며, 이는 정식 시호가 아니라 해방 후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이다. 순종과 사이에 자녀는 없다. 불교 법명은 대지월(大地月)이다.
1894년 9월 19일(음력 8월 20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에 당시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 민씨가 사망하자 1907년 1월 24일에 12살의 나이로 황태자비로 책봉되었고, 이때 아버지 윤택영과 서시모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 거액의 뇌물이 오갔다는 풍설이 돌았다. 그 해 부군인 황태자 순종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그녀도 황후가 되었다.
순정효황후는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국새(國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백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제에 의해 피탈되어 멸망을 맞게 되었다.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됐으므로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렀으며 1926년 4월,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사망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昌德宮)의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2].
해방 이후에는 1947년 신적강하 조치되어 이왕대비에서 평민으로 전락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창덕궁에 남아 황실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궁궐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는 조선인민군을 당시 5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순정효황후는 두려움을 모르는 여걸(女傑)이었다.
1951년 대한민국의 전세가 급박해지자 미군에 의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궁핍한 생활을 전전하던 끝에 1953년 한국휴전협정으로 전쟁이 중단되자 바로 환궁하려 하였으나, 제1공화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순정효황후에 대한 민심을 두려워하여 환궁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정릉의 수인제(修仁齊)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1959년에는 비구니로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얻었고, 이듬해 1960년, 전(前)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吳在璟)의 노력으로 환궁에 성공하였고,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 및 의민태자 일가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며 독서와 피아노 연주로 소일하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던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냉철함으로 황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평생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 실력은 타임지를 읽어낼 정도였다고 전한다. 1966년 2월 3일, 창덕궁 석복헌(錫福軒)에서 심장마비로 73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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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6 엠카운트다운 포토타임 비하인드 포토 ♡대방출♡
본인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동물을 표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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配文翻译:
200116 M countdown 拍照时间 幕后照片 ♡大放出♡
请表现出认为和自己相似的动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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